─끄적거림─

당신은 잊고 있겠지요

세티르 2008. 3. 3. 08:38
 
"다음에, 꼭 꼭 다시 만나면, 남자랑 여자로 만났으면 좋겠다. 그냥 친구로만 있어도 되는 거잖아?"

비가 내리지 않아서 내 슬픔이 더 컸을지도 모른다. 남자를 사랑한다는 것만으로 힘들다고 하는 건 아니다. 주위의 시선이 우리를, 아니 나를 힘들게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힘든 사랑 따윈 하지 않겠다고 누나한테 그렇게 말을 했는데...



"저를 그 돌에 담아 주시면 안되겠습니까?"

정령석이라고 돌아 담겨 오랜 시간 지나면 누군가에게 캐어져, 무기에 정착하여 그 주인을 도와줄 수 있는 사이... 다음 생에 남여로 만나자고 했지만 그렇게 만날 수 있는 지도 모르고, 누가 늦게 태어나고 그러면 할아버지와 어린 아이로 만날지도 모르는 그런 다음 생 따윈...

"인간의 육체는 버려야 되는 거 알고 있습니까? 이제 다시 윤회 할 수 없다는 것도 명심 하십시오. 다시 한 번 생각 해 보세요."

"그냥 거기 남겠습니다. 이러나 저러나 같을 거 같거든요."

한번 더 생각해 볼 것도 없다. 이미 포기했으니...






"아, 아찌~ 나 검남이 돌맹이 하나만 주라~"

"돈도 없는 게 뭔 정령이야~! 걍 적당히 살어!"

깽깽되는 여자애 목소리는 어떤 남자를 쥐어 뜯으면서 억지를 부리고 있었다.

"안해~ 돈 없어도 나 검남이~ 왕 잘생겼잖아! 이렇게 내 취향이기도 힘든데 말이야~ 검은 장발 흐윽~ 거기다가 냉정한 오라버니!!! 딱 내 타입이잖아! 언넝 내놔! 어차피 아찌는 검녀 한다면서! 그 로리로리 한다면서어어어!!!"

조용하다 못해 삭막한 반호르의 바리 던전 앞에서 독에 당한듯한 색깔으로 치장한 세티르가 빽빽 거리고 있었다. 상대는 정령석 던전에 갓 들어갔다 나왔는지 손에는 곡괭이가 들려있고, 많이 지쳐 있었다.

"아~ 시끄러 오냐! 그래 팔아봤자 얼마 받겠다고~ 너해라 자!"

바다에서 이끼낀 조개 같은 검의 정령석엔 남자 정령이 담겨져 있다고 되어있다. 받자 말자 팔딱팔딱 뛰는 소녀는 다급히 마을을 빠져 나갔다.

밤시간, 그것도 알비던전 문 게이트. 문 게이트를 타고 바로 시드스넷타로 향하는 소녀의 발걸음엔 즐거움이 넘쳐 흘렀다.

"앗싸~ 이름은 뭘로 짓지? 음음... 음음.... 타르라크랑 상의나 해야지~"

정령석과 숙련이 100이 찬 클레이모어와 엘리멘탈 리무버를 들고 눈 내리는 시드스넷타를 오르고 있었다. 드루이드의 제단에 서 있는 곰은 이웨카가 지고 문 게이트가 열려 이미 금발의 드루이드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 타르라크으!!!"

초반에 축포 알바로 벌어온 돈을 전부 숙련 100을 위해 사용했다는 것을 보면 정령검을 위해 엄청난 투자를 했다고 할 수 있다. 여신도 아직 구출하지 않은 소녀가, 환생 한번 하지 않은 소녀가 정령검을 위해 지극정성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축포 알바를 하고 100개를 모아 던바튼 은행 앞 기둥에 쭈그려 앉아서 힘들게 벌어온 돈으로 클레이모어를 사고 꼬박꼬박 반호르의 아이데른에게 수리를 받았다. 말 그대로 지극정성.

"이름은 세르디엔으로 해줘!!"

깊이 생각한 적도 없다. 단지 언제나 생각하고 있던 이름 세르디엔- 세르지나라는 친구와 세르지오라는 아는 아찌가 있어서 세르디엔이란 이름을 짓지 않았다. 어릴 때 부터 머리에 남아 있던 이름.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이름. 사랑했던 그 사람의 이름, 아직도 사랑하는 그 사람의 이름.






끊임없는 그대를 수호할 빛의 가호가

팔라라와 이웨카, 비와 대지,

정령과 신의 이름으로 함께 하리라...


"오랜 시간 어둠 속에 묻혀 있다가 이렇게 다시 세상으로 나오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군..."

세르디엔의 첫 마디였다.
소녀는 밀려오는 슬픔과 기쁨의 교차함을 느끼며 세르디엔을 들고 바쁜 걸음을 했다.

"그래? 좋은 꿈을 꾸고 있었던 거지? 만나게 되서 반가워!"

그는 그녀가 되어 있었다. 그와 함께 하면서 한 번도 남자로 환생한 적은 없다고 한다. 단 한 번도.

이젠 다른 이유가 생기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와 그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이젠 그와 그녀로 만날 수 있었다.

단지, 그녀의 옆엔 그가 함께라는 게 서글프지만...